땅
가장 깊은 곳에서 뛰는 심장이 있다.
눈으로 닿지 않고, 손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순간마다
쉼 없이 박동하는 심장.
땅이다.
땅은 늘 아래에 있다.
모든 걸 짊어진 채, 말없이 견디는 존재.
건물의 무게도, 인간의 욕망도,
끝없는 변화를 향한 속도도.
누가 그 아래로 내려가 보았던가.
저 심연 속 어둠이 얼마나 단단하고
얼마나 인내심이 깊은지를 아는가.
지면 위로 올려다본 마천루는
꼭대기가 안 보일 만큼 높지만,
그 기초를 받치는 땅의 깊이는
그보다 더 헤아릴 수 없이 깊다.
철근과 콘크리트가 아무리 촘촘해도,
결국엔 땅이 그 모든 무게를 품는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시간의 풍화에도 쓰러지지 않도록.
땅은 언제나 아래에서 모든 것을 안고 있다.
흙이라는 말이 주는 부드러움과
‘대지’가 품은 장엄함 사이에서,
땅은 수천의 이름을 가졌지만
단 하나의 품성을 지닌다.
묵묵히, 끈질기게, 그리고 겸손하게.
땅은 지구가 가진 가장 오래된 철학이다.
변함없이 낮고, 묵묵히 기다리며,
어떤 생명도 차별 없이 품는다.
사람이 짓밟고 지나가도 울지 않고,
묻혀도 되살아나며, 쓸모없다고 평가해도
스스로 빛나는 힘을 잃지 않는다.
땅은 언제나 스승이었고,
인간은 그 교훈을 자주 잊는다.
우리는 그 위를 ‘대지’라 부르고,
그 속을 ‘흙’이라 부른다.
때론 ‘토지’라 칭하며 그 가치를 매긴다.
같은 존재이되 이름만 바뀌어도
감정은 달라진다.
‘흙’이라 하면 손에 묻어도 괜찮을 것 같고,
‘토지’라 하면 갑자기 분양가가 떠오른다.
이름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는 기묘한 이중성,
어쩌면 땅은 인간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언제나 땅 위에서 벌어졌다.
피로 물든 전쟁도,
왕조의 흥망도, 문명의 탄생도
결국은 땅을 두고 싸운 이야기였다.
더 넓게, 더 비옥하게,
더 유리한 자리에 서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정복하고 파괴했다.
그렇게 쟁취한 땅은
언제부턴가 ‘부’가 되었고,
‘재산’이 되었으며, 이제는 ‘기회’가 되었다.
누군가는 땅 위에 높은 탑을 세워 부를 쌓고,
누군가는 땅 아래로 내몰려
햇살조차 들지 않는 공간에서 하루를 산다.
땅은 여전히 공평한데,
인간은 그 위에 불공평을 세운다.
싱크홀은 땅의 비명이다.
“나도 지친다.”
도시가 거듭날수록, 도로가 넓어지고
지하가 복잡해질수록, 땅은 조용히 무너진다.
그곳엔 수만 개의 파이프와
전선이 얽히고설켜 숨조차 쉬기 어렵다.
그리고 어느 날, 조용히 푹 꺼진다.
마치 울음을 참다 결국 터뜨리는 아이처럼.
땅의 고통은 눈에 띄지 않는다.
건물 아래 묻혀 있고,
아스팔트로 덮여 있으며,
우리가 걷는 인도에도
‘보도블록’이라는 가면을 쓴 채 존재한다.
아름답고 편리한 도시의 이면에는,
제 몸을 깎아 희생한 땅이 있다.
그리고 그 땅의 아픔은
우리 삶의 균형을 흔들고 있다.
건물은 점점 높아지고,
하늘은 점점 작아진다.
유리창에 비친 구름은 이제 진짜 구름인지,
조명인지 모호하다.
바람은 길을 잃고 골목에 갇힌 채
불안하게 맴돈다.
어릴 적 내 기억 속의 하늘은 드넓고 깨끗했다.
낮은 언덕 너머로 펼쳐지던 논밭,
발끝을 간질이던 풀잎,
들꽃 사이를 뛰놀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의 땅은 향기가 있었고, 온기가 있었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콘크리트 아래 잠들어 있다.
마당에 엎드려
개미 한 마리를 따라가던 어린 시절.
그때 나는 땅을 '작은 세계'로 여겼고,
땅 위에 펼쳐진 그 생명의 리듬을
경이롭게 느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해도,
다시 만나고 싶은 풍경이다.
우리는 도시를 만들었고,
그 안에 자신을 가뒀다.
그러나 여전히 땅은 말이 없다.
비가 오면 향기를 내고,
봄이 오면 새싹을 피우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그 땅에 나도 언젠가 돌아갈 것이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두렵기보다 안온하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간단한 일일 수 있다.
그 첫 걸음으로
환경을 생각하는 일상 속 작은 실천들.
그리고 땅을 기억하는 것.
우리는 그 품에서 태어났고,
그 위에서 살아가며,
그 안으로 돌아가는 생의 흐름을 잊지 않는 것.
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묵묵히, 조용히, 그리고 단단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