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몰랐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미지근한 찻잔의 온기가 식어갈 때쯤,
우리의 사랑도 조용히 식어가고 있었다는걸.
입술 끝에 스친 짧은 “괜찮아”가
가장 긴 기다림의 말이었다는 것을.
창밖 나무가
새잎 하나 틔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바람을 견뎌야 하는지 몰랐고,
시든 꽃잎에도 끝내 남는
한 줌의 향기가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모든 게 끝났다고 믿었던 어느 날,
그대 이름이 불쑥 가슴 깊은 데서 피어나
울컥, 나를 적실 때에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사랑은, 떠난 뒤에도
한 사람 안에 오래 머문다는 걸.
그땐 몰랐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마주 보는 일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말없이 오래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을.
시간은 뒤로 흐를 수 없지만,
기억은 늘 사랑의 처음을 향해
고요히 걸어간다는 것도.
아, 그땐 몰랐습니다.
사랑은 끝났을 때야말로
그 본질을 드러낸다는 걸요.
무심히 건넨 작별 인사 한마디조차
눈물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얼마나 많은 계절을 견뎠는지를
속삭이고 있었던 걸.
익숙함이라는 이름 아래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우린 얼마나 쉽게 놓쳐버렸는지요.
그리움이 하나씩 껍질을 벗겨낼 때마다
비로소 드러나는 빛,
마른 꽃잎의 잎맥 속에
아직 고이 숨겨진 향기처럼,
사랑은 지고 나서야
비로소 피어난다는 걸.
그땐 시간을 너무 믿었습니다.
오늘이라는 창에 기대
내일에도 당신이 있을 거라
아무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영원이라는 말이
그리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걸
그땐 정말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기다림마저도 사랑임을 압니다.
텅 빈 자리에 내가 아직 앉아 있는 이유,
시간이 데려간 것이 아니라
내가 흘려보낸 것이었다는 걸요.
아,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사랑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습을 바꾸어
우리를 천천히 기다리는 일이라는 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