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겨울나기

이 얀 2025. 1. 15. 00:23

짧은 해가 숨을 고르는 겨울,
눈 덮인 들판 한가운데
기억을 품은 채 서 있는 나무가 있다.
껍질 속 깊은 곳,
낡은 세월이 남긴 금빛 무늬를 품으며
그 나무는 오래된 별처럼
자신의 중심을 태우고 있다.

바람은 한숨처럼 지나가고
눈발은 작은 칼날로 스쳐 가지만,
뿌리는 어둠 속으로 더 깊이 내려간다.
그 어둠 속,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귀가 있다.
그 귀는 오래전 잃어버린 목소리까지도
다시 불러내는 법을 알고 있다.

사라진 이파리들이 남긴 자리는
별빛처럼 빈틈을 채운다.
그 빈틈에서 자라는 것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뒤
비로소 가벼워진,
새벽의 속삭임 같은 희망이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얼어붙은 땅을 딛고 지나가는
겨울의 심장은 느리게 뛰지만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그 심장이 남긴 떨림은
시간의 깊은 맥락으로 이어져,
봄이 찾아올 문을 연다.

우리도 그렇게,
이 겨울을 지나며 숨 쉬고 있다.
아무리 깊은 어둠이라 해도,
그 어둠을 뚫고 자라날 뿌리 하나
우리 안에 있다는 걸 잊지 않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