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인연
그가 왔다.
바람이 길 위에 놓은 나뭇잎처럼,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세상이 흔들렸다.
아침 안개 속에서 조용히 나부끼던
풀잎 하나가 갑자기 바람을 삼키듯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
먼 하늘을 품은 눈빛으로 문턱을 넘었다.
그 순간, 나의 하늘은
낯선 구름을 걸친 채 낮게 내려앉았다.
우리는 눈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침묵 속에서도 빛나는 대화.
서로의 손끝이 닿지 않아도,
공기마저 두 사람의 것이 되는
그런 기이한 날들이 있었다.
그의 숨결은 바다의 첫 파도처럼 와닿았다.
나는 그 파도에 실려 떠다니며
익숙하던 풍경이 낯설게 빛나는 걸 보았다.
그의 말은 바람의 궤적처럼 퍼졌고,
내 마음은 조용히 그 자국을 따라갔다.
그는 바람 같았다.
돌아보면 손에 잡히지 않고,
지나간 뒤에야 흔적을 남기는 바람.
그의 뒷모습이 남긴 그림자는
밤의 어둠보다 깊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는 내 마음 위를 걸어간 것이 아니라,
나를 나로 깎아낸 것이었다는 걸.
날아간 깃털의 무게만큼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깎여갔다.
그러나 그 깎인 자리는 아픔이 아닌,
매끄러운 곡선으로 둥글어졌다.
그의 발자국이 아픔의 선을 남기고 간 자리,
나는 비로소 둥글어진다.
둥글어진 마음은 다른 이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을 그릇이 된다.
그 둥근 마음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감쌀 준비를 하는
그것이 바람의 가르침일까.
떠나는 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온기를 전하러 가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바람을 인연이라 부르는 걸까.
스쳐 가는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나를 흔든다.
우리는 서로의 눈 속에서
숨어 있던 하늘을 발견한다.
누군가의 흔적을 품고
다시 길 위에 선다.
그렇게, 바람은 다시 불고,
인연은 또다시 문을 두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