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심연

이 얀 2024. 11. 21. 02:07

길고 긴 둑길 위,
검은 잔재의 어둠이 깃드는 시간.
황금빛 나팔의 울림은 이제,
세월에 걸린 나이 든 울림으로 남았다.

그곳에 서면,
머릿속은 지끈거리고
발 아래 구멍 난 시간이 아찔하게 흘러간다.
꽃이 타고 남은 자리가
검은 심연이 되어 나를 집어삼킬 듯.

어떤 이는 말했지.
씨앗은 빛 속에서 무르익고
계절은 잊지 않고 되돌아온다고.
하지만,
잿더미의 기억은 스스로 길을 끊었다.
발을 내디딜 돌멩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저기,
검은 꽃자리들은 속삭인다.
“우리는 안다,
돌아오지 못한 것들의 무게가
이 세상의 바닥을 얼마나 깊게 만드는지.”

나는 발끝에 다짐을 묻는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벗어나야 한다고.
그러나,
도약은 어딘가로 향하지도 못한 채
공중에서 스러지는 날갯짓만 하고 있다.

밤이 내리고,
둑길 위엔 고요가 깃든다.
나는 다시 묻는다.
이 모든 검은 잿빛의 향연에,
불씨 하나 정도는 남아 있을까.

바람에 실려 어디로든 가버린,
사라질 줄만 알았던 한 줌의 빛이
혹여 먼 곳에서
새벽의 토양을 덮고 있지는 않을까.

검은 잔재 위에서 나는 보았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누군가의 발끝 아래서,
불씨 하나가 깜빡거린다.
언젠가 다시 꽃이 될지 모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