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 하루는 오직 한 번의 무늬

이 얀 2024. 11. 19. 02:53

비단결처럼 부드럽던 날들은
언제나 첫 발자국처럼 떨리며 왔다.
서걱이는 잎새 위에
휘도는 바람의 입술로 남긴 흔적,
사라질 듯,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무늬.

바람은 무색하다지만,
어쩌면 붉고도 푸르렀다.
잎은 땅으로 스러지고
흙 속에서 숨을 틔우는 생명의 비밀을
한 사람,
아니 열 사람이 보지 못한 채 지나쳤다.

슬픔의 깊이를 재려다 손끝을 베인 자는
그 상처에서 노래를 들었다.
기쁨이란 물결이 아니라
깊이 뿌리내린 땅의 맥박이라는 걸,
사람들은 비로소 깨닫는다.

돌아오지 않는 사랑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 손에 얹어 준 따스함은
이름조차 몰랐다.
그래서 그저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먹구름이 덮은 창공이
곧 태양을 열었다.
빛은 내리꽂히지 않았다,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제서야 알았다.
하늘은 언제나
조금씩 달라지는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땅 위에 발을 디딘 내가 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나는 물었다.
“무엇이 너를 밀어내고,
또 무엇이 너를 돌아오게 하는가.”

그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나뭇잎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마침내 알았다.
매 순간이 다르고,
그 다름이 삶이라는 것을.

이 하루는 오직 한 번의 무늬.
잊히지 않을 무늬 속에서,
나는 다음 바람을 기다린다.